다이겐 셋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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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겐 셋사이는 센고쿠 시대의 인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보좌하여 이마가와 가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스루가국에서 태어나 겐닌 사에서 출가한 후,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아들 호키쿠마루(요시모토)의 교육을 담당했다. 요시모토의 가독 상속을 지원하고, 린자이 사의 주지로 정치와 군사에 참여하여 '흑의 재상'으로 불렸다. 셋사이는 갑상준 삼국 동맹 체결에 기여하는 등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나, 1555년에 사망했다. 그는 이마가와 가문의 융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그의 죽음 이후 가문이 쇠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이겐 셋사이는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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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겐 셋사이 | |
---|---|
기본 정보 | |
씨명 | 다이겐 셋사이 |
원 이름 | 다이겐 스우후 |
다른 이름 | 규에이 쇼키쿠 |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
출생 | 메이오 5년 (1496년) |
사망 | 고지 원년 윤10월 10일 (1555년 11월 23일) |
묘소 | 시즈오카현후지시의 젠토쿠지 절터 시즈오카현시즈오카시의 린제이 사 시즈오카현후지에다시의 초케이 사 |
씨족 | 이하리 씨 |
부모 | 아버지: 이하라 마사모리 어머니: 오키쓰 마사노부의 딸 |
경력 | |
주군 | 이마가와 요시모토 |
2. 생애
메이오(明應) 5년(1496년), 스루가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중신 이하라 사에몬노조 마사모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셋사이는 어릴 적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절에 들어갔으나, 그대로 선승(禪僧)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에이쇼 6년(1509년)에는 교토 겐닌 사(建仁寺)에서 출가하여 규에이 쇼기쿠(九英承菊일본어)라는 이름을 받았다.
겐닌 사에서 수행하던 중, 셋사이는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요청으로 스루가로 돌아와 우지치카의 다섯째 아들 호키쿠마루(方菊丸일본어)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 이후 호키쿠마루는 출가하여 바이가쿠 쇼호(梅岳承芳)로 불렸으며, 훗날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된다.
덴분 5년(1536년), 이마가와 가문의 가독 상속 분쟁(하나쿠라(花倉)의 난)이 일어나자, 셋사이는 쇼호(요시모토)를 지지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요시모토는 셋사이를 린자이 사(臨濟寺)의 주지로 임명하고 정치, 군사 고문으로 중용했다. 셋사이는 '집권(執權)' 혹은 '흑의(黑衣)의 재상(宰相)'으로 불리며 이마가와 가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셋사이는 외교적으로 다케다 씨와 결혼 동맹을 체결하고, 호조 씨와의 관계를 조율하여 동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군사적으로는 미카와 침공을 지휘하고, 아즈키자카 전투(小豆坂の戦い)에서 오다 씨를 격파하는 등 활약했다. 또한 오다 노부히로를 생포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인질 교환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내정, 외교 면에서도 셋사이는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 21개 조를 제정하고, 종교 통제 및 상업 정책을 추진하여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고지 원년(1555년) 윤 10월 10일, 셋사이는 스루가의 조케이 사(長慶寺)에서 입적하였다. 향년 60세였다. 그의 죽음은 이마가와 가문의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2. 1. 출생과 출가
메이오(明應) 5년(1496년), 스루가(駿河)의 센고쿠 다이묘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중신 이하라 사에몬노조 마사모리(庵原左衛門尉政盛일본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키쓰 마사노부(興津正信일본어)의 딸이다. 이하라씨는 스루가 이하라(현재의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주변을 다스리던 일족이었고, 오키쓰씨는 요코야마 성(橫山城일본어)을 본거지로 해운(海運)을 장악한 해적(수군)도 이끌고 있었다. 두 가문 모두 이마가와 씨의 중신으로 셋사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마가와 씨에 충절을 다해야 하는 의무를 지녔다.아버지 이하라 마사모리는 셋사이를 가까운 곳에 있는 젠토쿠 사(善得寺일본어)라는 절에 학문을 배우게 하기 위해 보냈으나, 셋사이는 그대로 선승(禪僧)의 길을 걸었다. 에이쇼 6년(1509년), 셋사이는 14살 때 교토로 올라가 겐닌 사(建仁寺)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스승 조안 류소(常庵龍崇일본어)에게 출가득도(出家得度)하여 규에이 쇼기쿠(九英承菊일본어)란 이름을 받았다.
겐닌 사에서 수행을 계속하였다면 겐닌 사의 주지에까지 오를 수 있었겠지만, 셋사이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수재(秀才)로 장래가 촉망된다는 소문을 들은 이마가와 우지치카가 셋사이에게 돌아와 이마가와 씨를 섬길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다섯째 아들인 호키쿠마루(方菊丸일본어)의 교육자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셋사이는 당혹스러웠겠지만, 아버지가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중신이었기에 거절할 수 없었다. 스루가로 내려가 젠토쿠 사에 있던 4살의 호키쿠마루를 맡아 양육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도 한다.[3]
그 후 우지치카의 허락을 얻어 호키쿠마루를 데리고 교로쿠 3년(1530년) 다시 겐닌 사에 들어가 수행을 계속했으나, 겐닌 사의 선(禪)에 만족하지 못하고 묘신 사(妙心寺)의 문을 두드렸다. 이때 호키쿠마루는 스승 조안 류소에게 출가득도하여 쇼호(承芳)라는 이름을 받았다.
또한 쇼호는 도호(道號)가 바이가쿠(梅岳일본어)로 정해져 이후 바이가쿠 쇼호로 불렸다. 우지치카가 죽은 뒤, 장남 우지테루(氏輝)가 가문을 계승하자 5남인 호키쿠마루는 그대로 선승이 되었다. 덴분 4년(1535년) 젠토쿠 사의 주지였던 긴케이 쇼슌(琴溪承舜일본어)의 7회기법요 때문에 스루가로 돌아가 다시 젠토쿠 사에 들어갔다.
2. 2. 이마가와 요시모토와의 만남
다이에이 2년(1522년)경, 셋사이는 '''규에이 쇼키쿠'''(九英承菊)라 자칭하며 스루가 후지산 기슭의 젠토쿠인(현재의 린자이지)에 입사하여 어린 시절 호키쿠마루로 불렸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교육을 담당했다.[3] 교토 오산의 겐닌지에서 수행할 때부터 수재로 장래를 촉망받았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주군 이마가와 우지치카는 셋사이에게 귀국하여 이마가와 가문을 섬길 것을 요청했지만, 일설에는 이 요청을 두 번이나 거절했다고 전해진다.교로쿠 3년(1530년), 겐닌지의 스승인 조안 류소에 의해 호키쿠마루(요시모토)는 득도 의식(나발염의)을 거행하고 쇼호로 개명했다. 두 사람은 더 깊은 수행을 위해 다이에이 5년(1525년)과 덴분 2년(1533년) 두 차례에 걸쳐 상락했고, 젠토쿠인에서 겐닌지로, 더 나아가 묘신지로 옮겨갔다. 이 무렵 쇼호(요시모토)는 도호 '센가쿠'를 받아 센가쿠 쇼호라 자칭했다.
다이에이 6년(1526년) 우지치카가 사망했을 당시 요시모토는 후지 군의 젠토쿠지에 있었다. 우지치카는 이마가와 가문의 안정을 위해 이하라 씨 출신인 셋사이에게 요시모토의 보좌역 및 양육 담당을 맡겼다. 덴분 4년(1535년), 젠토쿠지 주지였던 킨케이 쇼쥰의 7주기 법요를 위해 스루가로 돌아와 다시 젠토쿠지에 들어갔다.

2. 3. 요시모토의 가독 상속
덴분 5년(1536년) 3월 17일, 이마가와 우지테루와 그의 동생 히코고로가 같은 날 사망했다.[1] 이마가와 우지치카의 셋째 아들이자 요시모토의 이복 형인 겐코 에탄과 센가쿠 쇼호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벌어졌다.[1] 셋사이는 요시모토의 가독 상속을 위해 하나쿠라의 난을 일으켜 겐코 에탄을 자결하게 만들었다.[1] 이 공으로 셋사이는 환속하여 가독을 상속한 요시모토의 정치·군사 분야 최고 고문이 되었다.[1]2. 4. 셋사이의 활약
메이오(明應) 5년(1496년)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의 요청으로 그의 다섯째 아들 호키쿠마루(方菊丸일본어)의 교육을 맡게 되면서 셋사이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셋사이는 호키쿠마루를 데리고 교로쿠 3년(1530년) 겐닌 사(建仁寺)에 들어가 수행을 계속하였으나, 겐닌 사의 선(禪)에 만족하지 못하고 묘신 사(妙心寺)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호키쿠마루는 출가하여 바이가쿠 쇼호(梅岳承芳)로 불리게 되었다.[4]덴분 5년(1536년) 이마가와 가문의 가독 상속 분쟁(하나쿠라(花倉)의 난)에서 셋사이는 쇼호의 어머니 주케이니(壽桂尼)와 협력하여 쇼호가 승리하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로 환속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요시모토는 셋사이를 린자이 사(臨濟寺)의 주지로 임명하고 정치, 군사 고문으로 중용했다. 셋사이는 '집권(執權)' 혹은 '흑의(黑衣)의 재상(宰相)'으로 불리며 이마가와 가문을 이끌었다.[4]
셋사이는 덴분 6년(1537년) 다케다 노부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하루노부와 산조노 가타의 혼인을 주선하여 갑준 동맹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호조 우지쓰나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토의 난이 발발했다. 셋사이는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다케다 하루노부와 협력하여 가와고에 성 전투를 통해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덴분 12년(1543년)에는 묘신지 파로 전향하고 법명을 다이겐 소후(太原崇孚)로 바꾸었다.[4]
덴분 15년(1546년) 오다 노부히데가 미카와에 침입하자, 셋사이는 군사를 이끌고 개입하여 다하라 성(田原城)을 함락시켰다. 덴분 17년(1548년) 아즈키자카 전투(小豆坂の戦い)에서 오다 노부히데를 격파하고, 덴분 18년(1549년) 미카와 안조 성을 공격하여 오다 노부히로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오다 가문과의 인질 교환을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후의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를 되찾았다.

덴분 23년(1554년) 갑상준 삼국 동맹 체결에 힘써 이마가와 가문의 서쪽 방면 작전에 집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셋사이는 승려로서도 활약하여 린자이 사를 개창하고 묘신지의 주지에 취임하는 등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이마가와 가나 목록 추가 21개 조를 제정하고, 린자이 종을 중심으로 종교 통제와 상업 정책을 펼쳐 이마가와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2. 5. 만년
고지 원년(1555년) 윤 10월 10일, 스루가 초케이사에서 입적하였다. 향년 60세였다.[1]3. 평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오른팔로서 수완을 발휘하여 이마가와 가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흑의 재상', '명 보좌역', 군사 등으로 현재 평가받고 있다. 이마가와 부겐초에서는 '집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셋사이는 요시모토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로 후세에 인식되었다.[4] 그렇기 때문에 '셋사이가 살아 있었다면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고료군감에서는 셋사이 사후, 야마모토 간스케가 '이마가와 가문의 일은 모두 보주(셋사이)가 없으면 안 되는 집안이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에야스도 '요시모토는 셋사이 화상하고만 의논하여 국정을 집행했기 때문에 가신의 위엄이 가벼웠다. 그래서 셋사이가 죽은 후에는 국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이하라 타다타네가 다케다 신겐의 가신 야마모토 간스케의 의붓어머니 친족으로 여겨지고 있어, 셋사이와 간스케는 인척 관계였을 가능성도 있다.
셋사이는 어옥형 대 제종 례지사에서 요시모토에게 태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쳤다. 셋사이는 유덕한 승려라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존경하고, 선사, 상인 등의 호칭에 자만하여 타락하는 고승을 비난하는 등, 합리주의자로서의 소양을 보였다.
3. 1.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관계 (논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학문과 군학 스승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오와다 테츠오가 이 설을 지지하고 있다.[1] 그러나 셋사이가 슨푸에 있지 않았던 시기와 겹치고, 셋사이는 명목상의 스승이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셋사이의 제자가 가르쳤다는 설[5]도 있으며, 그 외 다른 의견이나 반론도 많다. 셋사이를 이에야스의 스승으로 보고 있는 『조야 구문 포고』의 기술도 의문시되고 있다.4. 관련 작품
4. 1. 드라마
- 도쿠가와 이에야스 (배우: 고바야시 게이주, 1983년, NHK 대하드라마)
- 다케다 신겐 (배우: 자이쓰 이치로, 1988년, NHK 대하드라마)
- 바람의 검심 (배우: 이부 마사토, 2007년, NHK 대하드라마)
- 여자 성주 나오토라 (배우: 사노 시로, 2017년, NHK 대하드라마)
- 기린이 온다 (배우: 이부키 고로, 2020년, NHK 대하드라마)
4. 2. 만화
미야시타 히데키의 센고쿠 외전 오케하자마 전기(고단샤)에서 요시모토를 이끌고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등장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젊은 날의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평생 처음으로 넘어야 할 거대한 적으로 그려진다.[1]4. 3. 소설
참조
[1]
서적
今川義元:自分の力量を以て国の法度を申付く
ミネルヴァ書房
2004-09-00
[2]
서적
今川義元
吉川弘文館
[3]
간행물
戦国大名今川氏と禅宗諸派
[4]
문서
今川文化の歴史的意義-和漢聯句を視座として-
[5]
서적
駿河の今川氏 第一集
谷島屋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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